에휴우...

조앤 K 롤링을 떠올릴 때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에휴우...

그녀에 대한 동경과 질투심을 동시에 쏟아 내는 감탄사입니다.

너무나 멋진 마법사 세계를 창조해 낸 그녀에 대한 동경이며, 동시에 그녀와 같은 재주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질투입니다. 그런데 그 질투의 근본은 그녀와 같은 재주가 없음에 대한 시기가 아니라 그녀가 갖게 된 돈에 대한 시기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라는 호그와트 교과서를 사주며 그녀가 누리게 된 경제적 풍요에 대한 시기심을 좀 버릴 수 있었습니다.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로 인한 수익금은 전액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하는 구절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조금 더 많이 가지려고 모으고, 없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가지려고 모으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을 버리고 일부분을 타인을 위해 바친다는 건 아름다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알기에 그녀에 대한 질투의 일부를 존경과 애정으로 바꾸어 볼 수 있었습니다. ‘신비한 동물 사전’과 ‘퀴디치의 역사’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지 말고 사서 각 가정에 한 권 씩 비치해 두길 권하는 바입니다. ㅎ ㅎ

에휴우...

<해리 포터>를 떠올릴 때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에휴우...

<해리 포터>에 대한 동경과 질투심을 동시에 쏟아 내는 감탄사입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해리 포터>에 대한 동경이며, 동시에 그와 같이 재미있는 세상을 먼저 발설해버린 <해리 포터>에 대한 질투입니다. 그리고 그 질투는 곱디고운 우리 딸의 질투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마법사 이야기를 쓰면 <해리 포터>를 ‘저작권 침해’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딸의 염려에 동조하는 엄마의 질투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마법의 세계를 다룬다고 저작권 침해에 해당되는 게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마법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행한 예감이 <해리 포터>에 대한 질투의 근본에 깔려 있습니다.

동경과 질투가 뒤섞인 마음으로 아들과 함께 <해리 포터>를 읽습니다. 주로 내가 소리내서 읽고 아들은 듣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아들은 눈뜨자마자 <해리 포터>를 읽어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학교에 갖고 갈 준비물 챙기는 일엔 영 관심이 없으면서 오늘은 읽다 만 <해리 포터> 아즈카반의 죄수를 읽겠다고 가방에 넣어 갔습니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니까 스스로 읽어 보겠다고 가방에 넣어 가는 걸 보니 목이 아프도록 읽어 준 보람이 느껴져서 뿌듯한 아침입니다.

<해리 포터>는 학교 영어 교과서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읽을 만한 책입니다. 그건 재미있기도 할뿐더러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할 ‘용기와 의리’로 똘똘 뭉친 책이기 때문입니다. 악에 맞서는 해리의 힘은 영웅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늘 ‘용기’와 ‘의리’에서 출발합니다. <해리 포터>의 곳곳에서 청소년이 가져야 할 덕목인 ‘용기’와 ‘의리’라는 이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해리포터> ‘비밀의 방’에서 말포이가 헤르미온느를 잡종이라고 했습니다. 정작 본인인 헤르미온느는 그 말의 의미조차 모르건만, 론은 말포이이게 주먹을 휘두릅니다. 왜냐하면 잡종이란 단어는 친구에게 쓰는 말이 아닌 걸로 아는 론이기 때문에 친구인 헤르미온느를 잡종이라 부르는 말포이를 상대로 싸울까 말까 고민하는 여지없이 그냥 달려들어 주먹을 날려 싸우는 겁니다. 론이 달려들어 싸우는 걸 보고 해리 역시 말포이 패와 붙어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친구인 론이 분노하는 걸 보면 분명 같이 싸워줘야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 주먹질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의리’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은 없습니다. 옳은 측은 옳은 측대로 그른 측은 그른 측대로 ‘의리’를 지키려고 주먹질에 가담합니다. 친구가 싸우는 걸 팔짱끼고 쳐다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론과 해리가 말포이와 말포이 친구들을 상대로 한 패싸움을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친구가 의로운 일로 싸울 땐 거들어야 한다는 엄마의 암시를 지혜로운 우리 아들이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해리포터>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말포이는 론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을 놀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론은 말포이가 한마디만 더 하면 곧 주먹을 날릴 기세입니다. 그리고 론 곁에 있던 해리도 여차하면 주먹판에 뛰어들 자세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친구의 자존심을 말포이가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자존심은 곧 나의 자존심입니다. 친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녀석들에 대한 주먹질. 그 역시 ‘용기’와 ‘의리’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다보니 우리 아들의 주먹이 생각납니다. 가녀리고 부드러운 사랑스런 아들의 주먹! 아들들의 주먹이 이렇게 가녀리고 부드러운 것이 걱정될 때 엄마들은 태권도를 보내고 싶어지나 봅니다. 싸움박질 가르치는 데가 아니건만, 아들이 건너야할 청소년기의 주먹질을 생각하면 태권도가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이런 불손한 생각을 하다니...

내가 에리히 캐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책을 통해 친구들과의 우정과 의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리 포터> 역시 용기 있는 세 친구의 모험을 통해 우정과 의리의 가치를 일깨워 주기에 더욱 가치가 빛납니다.

그리고 해리가 더 좋은 이유는 그가 타고난 ‘용기’와 ‘의리’의 화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고민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거란다.” 덤블도어 교수가 한 번 더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네가 톰 리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해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거란다.”

매 순간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삽니다.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볼 것인가 끌 것인가, 심지어 믹스로 할 것인가 원두로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늘 선택을 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단순한 것이 아니고 인생 행로를 나눌 수 있는 것일 때 더 많이 고민을 합니다. 그렇게 고민되는 선택의 순간에 ‘의리’를 ‘용기’있게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되길 바라며 동경과 질투를 뒤섞어 <해리 포터>를 생각합니다.

수용미학! 受容美學!

열네 살에 <어린왕자>를 읽었습니다.

그 후로 한 30년 동안에 열네 살에 만났던 어린왕자를 참 많이도 우려먹으며 살았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도, 코끼리를 먹은 뱀을 생각할 때도, 여우를 생각할 때도, 장미를 볼 때도, 시간 약속을 해 논 기쁨을 표현할 때도 열네 살의 추억 속에서 어린왕자가 걸어 나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린왕자는 순수의 상징으로 우정의 대명사로 사막의 우물처럼 귀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딸이 어린왕자를 뽑아 드는 걸 보았습니다. 딸은 여느 동화책처럼 어린왕자를 후딱 읽어치웠습니다. 그리고 딸이 하는 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재미도 없고.’

순수의 상징으로 맑음의 대변자로 어른들을 질책하는 어린왕자를 역시 순수하고 맑디맑기 그지없는 내 딸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모순입니다. 그래서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순수가 순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어린왕자와 내 딸 사이에 장벽으로 있는 걸까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아! 역시나 <어린왕자>는 아름다운 동화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습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 그러니 열 살 난 딸에겐 당연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재미 없는’ 동화였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만약 <어린왕자>를 읽고 너무 재미있다고 하는 열 살짜리 어린이가 있다면 분명 그 어린이의 정신세계는 한 서른 쯤, 아님 한 마흔쯤에 가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혹시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아이라서 사막과 별 간의 여행과 밀밭과 밀밭색이 나는 어린왕자의 흩날리는 머리칼을 3D로 상상해서 읽었다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구나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평범하게 순수하고 평범하게 맑은 상상력을 가진 어린이라면 <어린왕자>는 ‘뭐가 뭔지 모르겠고 재미도 없는’ 게 당연할 겁니다.

1900년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비행사였습니다. 1921년 공군에 복무하면서 비행사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1926년에 <비행사>, 1929년에 <남방 우편 비행기>를, 1931년에 <인간의 대지>를, 1941년에 <야간 비행>을, 1942년에 <싸우는 조종사>를, 그리고 1943년에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와 <어린 왕자>를 썼습니다. 그리고 연합군 정찰비행대에 들어간 생텍쥐페리는 1944년 7월, 코르시카섬 기지에서 정찰을 떠난 후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어린왕자>는 20대의 <비행사>와 30대의 <남방 우편 비행기>와 <인간의 대지> 그리고 40대의 <야간 비행>과 <싸우는 조종사>,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너머에 있는 소설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가치관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왕자>는 인간 생텍쥐페리의 가장 깊고 성숙한 성찰이 투영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40을 넘긴 작가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가치는 ‘선택과 책임’입니다. 그가 여우와 어린왕자의 입을 통해 말하는 ‘길들임’이란 선택한 대상에 대한 '익숙함'을 뜻하고, 뱀과 어린왕자의 입을 통해 말하는 ‘돌아감’이란 선’한 대상에 대한 ‘책임’을 뜻합니다.

그 책임이란 ‘길들인 대상에 대한 예의’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길들인 사람을 대하는 데 가장 필요한 가치. 책임, 믿음, 예의.

<어린왕자>는 뻔뻔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를 길들여버린 장미를 향해 떠납니다. 그 장미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장미가 아니라 수천 수만 송이 장미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가 있는 별을 향해 떠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 별을 향해 떠나게 도와주는 역할을 뱀이 합니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뱀이 있듯이 어린왕자와 장미 사이에 뱀이 있습니다. 금단의 과일을 따 먹으라고 뱀이 꼬드기듯 금단의 선을 넘어서라고 뱀이 꼬드겼습니다. 뱀은 어린왕자를 어디로 보냈을까요.

열네 살에 읽었던 <어린왕자>에서 나는 코끼리를 통째로 삼킨 보아구렁이를 보았고, 방울소리를 내는 우물과 수천의 사연 있는 별을 보았다. 그리고 길들여지길 원하는 여우를 기억했습니다.

사십여 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는 <어린왕자>에서 지나친 명령은 하지 않는 슬기로운 왕을 보았고, 교만을 가릴 만큼 아름다운 장미를 보았고, 선택에 대한 책임감으로 번뇌하는 ‘여린왕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번뇌를 끊어주는 뱀을 보았고, 지중해 바다에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작가 생텍쥐페리를 보았습니다.

---어린 왕자는 뱀을 향해 걸어갔다....

79쪽

뱀은 마치 금팔찌같이 왕자의 발목을 돌돌 감고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건드리는 사람은 제가 나왔던 땅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되는 거야. 그러나 넌 순진하고 게다가 다른 별에서 왔으니까..... .”

왕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같이 연약한 사람이 이처럼 바위투성이인 지구에 오다니, 참 가엾은 생각이 드는구나. 만일 네가 네 별이 못견디게 그리워져 돌아가고 싶다면 어떻게 하든지 도와 주겠어. 그리고...... .”

---생텍쥐페리는 전쟁의 포화 속으로 날아갔다....

---어린 왕자는 장미에 대한 책임감으로 지구를 떠나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

89쪽

“내가 나의 장미꽃을 소중히 여기는 건...... .”

왕자는 이것도 잊지 않도록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사람이란 이런 소중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어. 그러나 너는 이걸 잊어서는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지키지 않으면 안 돼. 장미꽃과의 약속을...... .”

100쪽

왕자는 한참 동안 있다가 또 말했습니다.

“너 좋은 독 갖고 있니? 날 오래 아프게 하지 않을 자신 있니?”

나는 가슴이 뭉클해져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조금 있다가 또 말했습니다.

“이젠 저리 비켜.... . 나 내려가고 싶어.”

그 때, 나는 담 아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곳에는 30초 안으로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노란 뱀 한 마리가 왕자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105쪽

“하긴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긴 하지만..... .”

105쪽

어린 왕자는 내 손을 잡고 몹시 걱정이 되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지 말 걸 그랬어. 걱정을 하게 될 테니까. 난 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야.... .”

나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아저씨, 그 곳은 너무 멀어. 이 몸뚱이를 가지고 갈 수 없단 말이야. 너무 무거워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몸뚱이는 헌 껍질 같은 거야. 헌 껍질 같은 건 버려도 슬프지 않아......”

106쪽

왕자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젠 다 왔어. 나 혼자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게 가만 내버려 둬 줘.”

그러면서 왕자는 모래 위에 앉았습니다.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는 이렇게 또 말했습니다.

“이거 봐 아저씨, 내 꽃 말이야..... 난 그 꽃에게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그건 정말 약한 꽃이야. 그리고 순진하고, 바깥 세력에 대항하여 자기의 몸을 지키는 거라곤 네 개의 자그마한 가시밖에 없는 꽃이야...... .”

107쪽

어린 왕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일어서서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습니다.

그러나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왕자의 발목 근처에 노란빛이 번쩍 빛났습니다. 어린 왕자는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리도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마침내 나무가 쓰러지듯 조용히 쓰러졌습니다. 땅이 모래이기 때문에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생텍쥐페리는 무엇에 대한 책임감으로 코르시카섬을 향해 날아갔던 것일까....

20대의 <비행사>와 30대의 <남방 우편 비행기>와 <인간의 대지> 그리고 40대의 <야간 비행>과 <싸우는 조종사>,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그의 소설을 끝맺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그의 삶도 매듭지어졌습니다. 전쟁 중 정찰비행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작가는 혹시 <어린 왕자>가 아닌 ‘여린 왕자’와 같은 선택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이기에 순수의 상징 <어린왕자>를 두고 이런 의문을 품어볼 수 있는 게 아니겠나 합니다.


2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대학교 때의 지도교수님을 뵈었습니다.

“선생님, 예전에 읽지 못했던 세계명작소설들을 요즘 읽고 있는데요,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십대에 이런 책을 읽었던들 얼마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요.”

그 때 교수님께서 딱 집어주신 한마디.

“그렇게 접근하는 게 바로 수용미학이지.”

‘이런 소설을 나이 스물에 읽은들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으랴’와 ‘이제야 이런 소설을 읽다니’ 하는 감정의 교차점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정리해주는 단어.

수용미학! 受容美學!

리얼리즘이나 참여문학이 아니면 한쪽으로 젖혀놓고 보던 스물의 시절에 들었다면 ‘수용미학’이란 단어는 귓등으로 넘겼을 단어입니다. 그러나 ‘스물의 나이였다면 내가 뭘 알았을까?’ 하고 안타까워하는 나이에 듣는 ‘수용미학’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한편의 시처럼 감동적이었습니다.

수용미학.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두를 외듯 ‘受容美學!’을 외며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곤 생각했습니다.

‘누구든 만남을 선택해야 하는 나이가 되면 어린왕자를 읽어보라 해야지. 인연을 쉽사리 만들지 않고 인연을 쉽사리 버리지 않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어린 왕자>를 읽고 마음에 내내 ‘여린 왕자’가 남아 생각함에 측은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이런 것도 배우고 저런 것도 보고, 자랑스러움도 느껴보고 부당한 상황도 당해보고, 어려움도 겪어보고, 부조리함에 내성도 기르는 게 학교를 통한 성장의 과정일 텐데....... 게 중 아프고 나쁘고 부당한 것 다 빠진 상태에서 아름답게만 크길 바라는 부모는 아닐까하고 스스로를 점검해 본다. 그래도 초등생들이 보는 사회 교과서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표준되는 내용만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 문제를 제기해 본다.

2010학년도 초등 학교 3-1학기 사회교과서 61쪽의 내용이다.

활동 1 . 고장마다 여러 분야에서 고장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인물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요?

옛날 ( )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인물들 --- 충신, 장군, 독립운동가, 정치인, 예술가, ( ? ) 경제인, 교육자, 운동선수, 학자, 효녀, 효자. ( ? )

오늘날 ( )

( ? ) 부문에 해당하는 직업군을 아이들이 써 넣는 데 각 출판사마다 연예인을 보기로 넣어 가르치고 있다. 한 문제집 출판사 사회담당자에게 어떤 근거로 연예인을 고장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에 넣었는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나오는 교사용 지도서에 연예인이라고 나와 있어서 그 기준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학교에서도 연예인을 ( ? ) 에 맞는 내용으로 가르치고 있다.

물론 다분히 개인적인 견해긴 하지만, 고장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이라고 하는 내용에서 연예인이라는 직업군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국정 교과서 내용은 어떤 책보다도 더 공정해야하고 교육적이어야 한다.  조금 더 세심하게 어린이를 배려한다면 연예인도 예술가의 범주에 들어가므로 따로 떼어 이야기하지 않음이이 행여 생길 수 있는 무리수를 줄이는 길이 아닐까 한다.

교육,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공교육은 사회현실을 반영하기도 해야겠지만 사회의 이념을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공교육이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아래 내용의 ( ? )에 어떤 직업군을 넣을지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판단력이 미약한 어린이들이 보는 책이기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숭고한 삶을 산 독립운동가와 텔레비전에서 보는 연예인을  아무런 설명 없이 뒤섞어  설명함은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공교육 교과서의 내용은 모두가 인정 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본다. 어떠한 역사적 사실도 시대와 양심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는 아이들에게 주입시켜서는 안 된다.  내 아이들이 연예인을 고장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이라 인지하면서 개그맨이나 댄스가수를 꿈으로 삼고 자라길 원하지 않는 학부모의 의견이 반영되는 사회교과서가 되면 좋겠다.

그럼 어떤 대안이 있을까?

우선 유명하다는 것과 자랑스럽다는 것이 같은 개념이 될 수 없음을 편찬자들이 살펴야 할 것이다. 그 기본적 차이를 간과하여 훌륭한 인물들과 유명한 인물들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하는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라고 본다.

편찬자인 한국교원대학교 국정도서사회편찬위원회와 저작권자인 교육과학기술부는 초등생들의 흡수력을 생각하여 내용 선별에 신중을 기해주길 바란다.

물론 이렇게 문제시하자면 운동선수를 말함에도 걸리는 게 있고 악덕기업주를 생각함에 경제인을 넣을 수 있나 생각하게 되고 사사로운 이익을 중시하는 정치인도 걸리고 비교육적인 교육자도 걸린다. 그러니 교육현장에서 이 부분을 가르칠 땐 공공의 이익에 충실한, 훌륭한, 정의로운 이라는 잣대를 가르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공교육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