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우지승

소리 없이 커지고,

시간에 의해

소리 없이 없어지고.

보석들을 담은

보석함 돌.

어느 보석함은 비어있네.

 

 

빛을 보는 돌과

빛을 보지 못하는 돌

서로 모여 이룬

웅장하고 잔잔한 돌들의 왕국

보석들을 담은 돌들의 보석왕국.

 

서로 부딪혀라

밀어내라

깨져라

부서져라!

바위 왕국의 규칙,

죽으면 묻지 마라.

부셔지면 묻지 마라.

소리 없이 사라지고

흙과 모래가 되게....

 

2015517일 옥천 정지용 백일장에서

 

 

 

 

 

 

 

 

 

바위

우지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저기 저 큰 바위는 온몸을 치켜세우네.

 

바람이 살랑대면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벼가

고개를 제아무리 숙인들 무엇 하리.

바람이 스쳐가서

제 몸이 아무리 닳아도

꿋꿋이 서있는 바위가 있는걸.

 

나는 누군가에게는 벼여야 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꿋꿋한 바위여야겠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저기 저 큰 바위는 온몸을 치켜세우네.



2015
517일 옥천 정지용 백일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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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때는 3000,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와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좋은 일들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게 되었고, 천국의 세력도 점점 커졌다. 그에 따라 천국의 수호자들도 더욱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것에 불만을 느낀 지옥의 수호자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천국의 세력이 너무 커져버린 상태였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기는커녕, 예로부터 전해오던 예언 속의 아이를 찾으려 했다. 그 아이를 찾는다면 그 아이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던 힘으로 엄청난 승리를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이런 수수께끼 같은 시 하나 뿐이었다.

 

아리따운 처녀들과 소녀들이 그네뛰기를 할 때

세상의 빛을 발견한 자 만이

듣는 소리 뒤에 어둠이 있는 자 만이

반쪽으로 태어났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지내는 자가

그대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1-

지옥의 수호자들의 왕인 염라대왕과 저승사자 사라이온’, 그리고 악마들과 다크엘프들은 이 수수께끼를 푸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염라대왕이 붉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을 흔들거리며 말하였다.

처녀들과 소녀들이 그네뛰기를 할 때가 단오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런데 그날 세상의 빛을 보았다는 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대신들은 저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다크엘프들 중에서 매우 똑똑한 편인 레골리스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단오 날 태어났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자 염라대왕은 곧장 그 말을 이해하고는 무릎을 치며 외쳤다.

그렇군!”

그러고는 레골리스를 감탄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레골리스는 차가우면서도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른 이들은 그녀의 말을 이해해 보려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용기를 내어 데이브가 물었다.

그런데 빛을 보았다는 게 태어났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죠?”

레골리스가 찡그린 얼굴로 대답하려던 찰나, 데이브는 스스로 그 이유를 깨닫고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아하~ 그거였구나! 이제 왠지 알겠어요!”

레골리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가 또 물어보기만 한다면 한 대 칠 기세였다. 염라대왕이 나름 품위 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골리스, 그만하면 됐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듣는 소리 뒤에 어둠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염라대왕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레골리스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대신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뾰족한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때 유명한 학자이자 악마인 케븐이 들어와서 정중하게 말하였다.

염라대왕님, 약속하신 면담시간입니다.”

염라대왕은 한쪽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힐끔 보더니 말하였다.

그렇군. 십분 후에 올 테니 그동안 계속 고민해 보도록!”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금 불량스러운 걸음걸이로 유유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회의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벌떡 일어나서 염라대왕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동안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곧 열렬한 몸으로파인 위프랄라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몇 분 동안만 파끼리 모여서 의논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또 다른 악마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요!”

대부분의 대신들이 찬성의 뜻을 보이는 것을 보고는 주위를 서성이던 사라이온이 염라대왕의 오른쪽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좋소. 그러 이제부터 파끼리 모여서 의논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시오.”

곧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신들이 네 무리로 나뉘어졌다.

이곳에는 모두 네 개의 파가 있는데, ‘몸으로파와 힘으로, ‘머리로파와 생각으로파가 있다. ‘몸으로파는 말 그대로 몸으로 해결하려는 파이다. ‘머리로파는 머리로 해결하고, ‘생각으로파는 오직 고도의 집중력으로 인해 떠오르는 생각으로 모든 것 을 해결하려는 파이다. 마지막으로 힘으로파는 그저 힘으로 해결하려는 파이다.

몸으로파와 힘으로, ‘머리로파와 생각으로파끼리는 매우 친하다. 그러나 몸으로파와 힘으로파는 다른 두 파를 게으르고 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서 싫어한다. 반대로 머리로파와 생각으로파는 다른 두 파를 무식하다며 멀리한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말싸움이 매우 잦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라이온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사라이온이 직접 나서서 자제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들의 장들이 눈치를 채고 조용히 시켰기 때문이다.

머리로파의 장이 힘으로파와 몸으로파의 장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번에는 저 무식한 녀석들에게 영광의 자리를 빼앗겼으나, 이번에는 꼭 다시 되찾음으로써 우리 머리로파의 힘을 보여 주어야 한다!”

다른 이들은 짧지만 강력한 연설로 사기를 높여주는 족장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며 맞장구를 쳤다. 족장이자, 악마인 그의 이름은 로든이었다. 로든은 그를 빛나게 해주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찌르는 긴 앞머리를 멋있게 뒤로 넘겼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물었다.

크흠, 그러면 듣는 소리 뒤에 어둠이 있다는데,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그러자 아까 혼자 한참을 고민하던 에델이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듣는 소리란 를 말하는 거 같은데요...”

에델은 은근히 로든의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든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레골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둠이란... 귀 뒤에 까만 머리카락이 있다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하나군.”

그게 뭔데요?”

아직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벨리가 물었다. 그러자 로든이 대답했다.

.”

로든의 말에 다른 이들이 모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에델이 물었다.

잠시만요, 제 얘기를 듣기는 들으셨어요?”

그러자 레골리스는 눈살을 찌푸렸고, 그녀의 옆에 있던 레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래, 모두 다 들었어.”

레나의 말에서 빈정거림이 느껴지자 에델이 발끈 하여 한마디 하려는 찰나, 로든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래, 에델. 아주 훌륭한 생각이었어.”

에델은 칭찬을 받았음에도 미소를 짓거나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로든의 말에서는 마지못해 칭찬하는 말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든은 더 이상 에델의 기분에 신경을 쓰지 않고 힘으로파를 힐끔 쳐다보았다. 분위기로 봐서는 아직 못 푼 것 같았다. 로든은 그들을 이긴 게 너무나 기쁘고 뿌듯해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힘 있게 폈다.

머리로파와 염라대왕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회의가 끝날 대가 되자 염라대왕이 서기에게 작성지를 받아서 살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그 수수께끼를 다 풀었다.”

그러자 함성이 잠깐 동안 일어났다. 대신들의 기쁨에 찬 함성이었다. 함성소리가 잦아들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수수께끼를 푸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머리로파의 장에게 그것을 읊는 특권을 내리겠다.”

로든은 그가 내미는 종이를 받으며 몸을 숙여 절했다. 그리고는 대신들을 향해 돌아섰다. 로든은 힘으로파의 장이 오만상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는 잘난 척 하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언의 아이는 단오 날 태어났고, 귀 뒤에 점이 있으며, 쌍둥이이고, 고아원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점점 읽어 나갈수록 잘난 척 하던 목소리는 점점 감성적으로 변했다. ‘힘으로파와 몸으로파는 예의상 듣는 척만 하였지만, ‘머리로파의 대신들은 마치 릴케의 시라도 감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낭독이 끝난 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로든은 그 종이를 염라대왕에게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정중하게 건냈다.

여기 있습니다. 받아주십시요.”

염라대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다시 서기에게 넘겼다. 그의 눈길이 서기에게서 다시 로든에게로 돌아오자, 로든이 말했다.

오늘 주신 영광의 기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는 말을 끝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염라대왕은 아무 말 없이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대신들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이번 회의는 끝났다. 예언속의 아이를 찾으러 갈 영광의 이들은 내가 따로 불러서 말하겠다. 그러니 이제 모두 돌아가도록!”

대신들은 저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영광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며 회의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대신들이 모두 나가고 사라이온과 염라대왕만 회의실에 남게 되자 염라대왕이 입을 열었다.

사라이온, 네가 가서 그 아이를 찾아 오거라.”

사라이온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 저 혼자만 갑니까?”

염라대왕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레골리스와 에델, 헴리와 함께 가거라.”

!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사라이온의 눈동자에는 사명감과 열정이 가득했다.

 

 

-2-

저승사자나 하늘사자는 평범한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 단지 머리가 조금 더 잘 굴러간다는 점이 다르다. 그냥 머리도 아닌 잔머리가 더 잘 굴러간다고 보면 된다. 사라이온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염라대왕에게 더 많은 신임과 믿음을 얻고자 했다. 그러기에 열심히 잔머리를 굴려 그 아이를 찾기 위한, 그리고 무사히 데려오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분장거짓말이었다.

사라이온이 오른쪽에는 모자로 뾰족한 귀를 감춘 레골리스를, 왼쪽에는 평범한 옷차림의 헴리를 끼고 한숨을 내쉬며 <고아원> 간판을 단 건물의 초인종을 눌렀다. 벌써 12번째이다. 레골리스는 그래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작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단오가 아니라 춘절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그 넓은 중국의 방방곡곡을 다 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귀 뒤에 점이 있는 아이 하나를 찾으러.

초인종을 누른 지 7초정도 지났을 때였다. 인터폰에서 약간 지친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러자 사라이온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저희는 어린이 안전 재단에서 나왔는데요, 이번 년도에는 고아원 아이들을 상대로 활동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간단한 건강검진을 한다는 건가요?”

. 그렇습니다.”

사라이온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헴리는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라이온과 레골리스 뒤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러면서 잠깐 동안 에델을 떠올렸다. 에델은 떠나기 전날, 발목을 심하게 삐어서 못 오게 되었다. 아마 그가 왔다면 레골리스의 불쾌지수가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에델이 눈치가 없기 때문인데, 그걸로 따지면 에델이 오지 못한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레골리스의 불쾌지수를 높여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깐. 헴리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신경이 쓰였다. 에델이 그를 질투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기회를 발목부상으로 놓치게 된다면 누구나 질투가 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일이 중요하고, 이렇게 중요한 일에서 성공하면 염라대왕의 많은 신임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이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50대 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나와서 그들에게 스스로를 원장이라 소개했다. 그들은 원장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건강검진을 하러 오셨다면서요?”

원장의 물음에 사라이온이 대답했다.

, 더 자세히 말하자면 비만, 혹은 저체중, 심리에 관한 것들이죠.”

원장의 눈썹이 저체중이라는 단어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니겠죠?”

. 길어봤자 1시간 30이면 될 겁니다.”

원장은 사라이온의 대답에 만족해하며 아이들을 차례로 불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입을 벌려 보고, 눈 속을 들여다보는 일들을 시작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해서 그런지 훨씬 능숙해진 손놀림으로 아이들을 다루었다.

지하세계에서는 누구나 필수적으로 기본의학을 배우고 연구해야 했다. 헴리는 그가 그토록 하기 싫어했던 의학 공부가 이런 데서 쓰이게 되자 기분이 무척 좋았다. 또 재미없는 이론과는 달리 재미있고 무척 보람차게 느껴졌다. 1시간이 지나고, 1시간 30이 지나자 사라이온과 레골리스의 불쾌지수는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헴리는 즐겁게 웃으면서 하고 있었다.

레골리스가 눈이 작고 통통하지만 남자답게 생긴 아이에게 물었다.

안녕, 너는 이름이 뭐니?”

“‘시후.”

무슨 시후?”

레골리스가 부드럽게 묻자, 시후는 어개를 으쓱 하더니 말했다.

몰라요.”

레골리스는 묵묵하게 대답하는 그 아이에게 난생처음 안쓰러움을 느꼈다. 레골리스가 어색한 미소를 띄며 물었다.

나이는?”

“12.”

혈액형?”

“B형이요.”

... 알겠어.”

레골리스는 그것들을 모두 적고 난 다음 물었다.

혹시 동생이나 언니, 누나, 형이 있니?”

아니요...저 쌍둥인데요.”

레골리스는 흥분되는 마음을 감추고 지나가듯이 물었다.

근데 혹시 너, 귀 뒤나 얼굴에 점이 있니?”

귀 뒤에요. 근데 그건 왜요?‘

시후가 따지듯이 묻자 레골리스는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그러고는 사라이온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사라이온은 레골리스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얼른 그 남자아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기쁨 너머의 웃음이 스쳐갔다. 사라이온이 시후에게 말했다.

이제 이쪽으로 와 보렴, 쌍둥이라고? ...너의 쌍둥이는 이름이 뭐니?”

“‘지유.”

...생일이 어떻게 되니?”

음력으로 55, 단오 날 이예요.”

시후가 대답하자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원장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얘 생일 날 하나는 용하지요?”

그러네요, 하하하

사라이온이 떨리는 가슴을 안고 대답했다. 레골리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너 혹시 책 읽는 거 좋아하니?”

갑자기 시후의 눈이 반짝였다.

!”

무슨 책?”

역사하고 판타지요.”

그래, 책 많이 읽으면 좋지.”

레골리스가 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혹시 우리 가는 길에 같이 나서서 내 차에 있는 책 좀 빌려 갈래?”

어떤 책인데요?”

레골리스는 있지도 않은 책 제목을 지어내서 말했다.

“<긴 여행길> 하고 <마법 학교> 라는 책이란다.”

.. 좋아요! 근데...”

시후가 말끝을 흐리며 원장의 눈치를 살폈다. 원장은 그런 시후를 보면서 흔쾌히 승낙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헴리가 그들을 치며 말했다.

저기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거 같은데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요.”

그러게...다음에 시간이 되면 와서 못한 아이들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사라이온이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레골리스도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동안 원장은 아이들에게 가 보았고, 시후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들이 준비를 끝내자, 원장은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고, 그들도 즐거웠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시후를 데리고 차로 가는 척을 하다가 원장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자마자 시후를 붙잡고 사라졌다.

 

-3-

옥황상제는 하늘에서 세상을 둘러보다가 정확한 직감으로 남자아이 하나가 지하세계로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옆에 있던 하늘사자도 그것을 느끼고는 물었다.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했을 까요?”

하늘사자, 하라이온의 질문에 옥황상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눈을 번쩍 뜨고는 이렇게 외쳤다,

!”

왜요?”

그거였어! 예언속의 아이를 찾아서 데려 간 거야!”

하라이온의 머리가 재빨리 굴러갔다.

무슨 조치를 취할까요?”

옥황상제가 아무 말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한 여자아이가 누군가의 이름을 힘껏 부르며 달리고 있었다.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이런, 그 아이의 쌍둥이 동생이로구나. 천사들을 시켜서 우선 저 아이를 데려오게 하여라.”

. 알겠습니다.”

하라이온이 대답하고는 황급히 문을 나서서, 로우라는 이름과 아리엘이라는 이름의 두 천사를 불러 말했다.

옥황상제님의 명이시다. 지상으로 내려가서 저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신다.”

. 알겠습니다.”

두 천사는 순식간에 커다란 날개를 이용해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천사가 그 사람을 건드리면 볼 수 있게 된다. 아리엘은 부드러운 날개를 살짝 접으며 땅에 내려앉아서 소녀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다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파란색 나뭇잎을 소녀의 얼굴에 살며시 댔다. 몇 분 동안 잠이 들게 하는 약초로, ‘비로라는 이름의 희귀한 풀이다. 소녀가 하늘나라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시후는 지하세계의 한 호화스러운 방 안에서 눈을 떴다.

 

-4-

시후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시후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 레골리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뭘 그리 놀라?”

시후는 레골리스를 보고는 아까 보았던 그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순간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겁이 났다. 여기는 어디일까? 시후는 아무도 자신을 해칠 것 같지 않아 보여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그의 질문에 모든 이들이 피식 하고 웃었다. 베타라는 이름의 악마가 시후에게 컵을 건네며 물었다.

목 좀 축이지 그래? 그냥 주스니까 걱정 말고.”

그제 서야 시후는 아래를 둘러보았다. 식탁에는 간단한 음식과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후는 만일을 위하여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후의 생각을 알았는지 베타는 옆에 있던 음료수를 집어 들고 마시더니 말했다.

것 봐, 그냥 오렌지 주스라니깐.”

시후가 냄새를 맡아보니 정말 그랬다. 그러나 주스를 마시지도 건드리지도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라이온은 확신에 찾지만 조바심이 났다. 확신에 찬 이유는 시후가 정말 예언 속의 아이가 맞다는 느낌에서였고, 조바심이 난 이유는 시후가 주스를 마시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저 주스 안에는 수면제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들어있었다. 사라이온이 말했다.

먹기 싫다면 굳이 먹을 필요야 없지.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냐고?”

시후가 대답이 없자 사라이온이 말을 이었다.

나는 저승사자다.”

그럼 여기는 천국? 내가 죽은 거예요?”

아니! 저승사자가 왜 천국에 있겠냐?”

그렇지만 나는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갈 만한 나쁜 짓은 하지 않았어요.”

다른 이들은 모두 큰 소리로 웃었지만 사라이온은 진지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진짜 나는 나쁜 짓을 안했으니까요.”

아니, 아니. 왜 여기가 지옥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냔 말이야.”

그건...”

지후는 말문이 탁 막혔다.

여기가 지옥이라면 왜 내가 여기 왔죠?”

그건, 아직 알려줄 수 없어.”

사라이온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쉰 시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근데 원장님이 내가 없어진 걸 알면 걱정하실 텐데요. 그리고 지유도 무지 걱정할 텐데..”

비록 많이 싸우기는 했어도 친했는데. 그리고 우리는 어쨌든 가족인데.. 지유, 내가 걱정되어서 우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자 저절로 기분이 우울해지고 나빠졌다. 사라이온이 진심으로 안됐다는 표정으로 시후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감싸듯이 토닥여 주었다.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움찔했지만 곧 경계를 풀었다. 사라이온은 음료수를 먹이기는 틀렸다는 걸 깨달은 터라 어쩔 수 없이 시후가 경계를 풀은 그 틈을 타서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까만 장미의 가시로 팔뚝을 살짝 찔렀다. 그리고 얼른 다시 호주머니에 넣었다. 시후는 팔이 잠깐 따끔했으나 그냥 쥐가 났나보다, 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따가움을 느끼자 팔을 조심스럽게 만져보며 말했다.

여기가 따가운데, 왜 그러지?”

괜찮니?”

시후는 계속 따끔거리는 팔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사라이온에게 대답했다.

...그런 거 같아요.”

시후의 대답을 들으며 사라이온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시후의 기억이 모두 초기화 될 것이다. 그게 그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번 일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을 놓쳤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5-

시후가 수면제로 인해 잠이들자, 사라이온은 다른 이들에게 시후를 침대로 옮기라고 명령한 뒤, 염라대왕을 찾아가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계획대로 잘 된 모양이군. 그에게 무술 선생과 학문 선생을 붙여두게. 더욱 더 전사의 모습을 갖출 시간을 주자고. 아직은 너무 어리지 않나?”

그럼 학문 선생은 누구로 할까요?”

학문 선생은 케븐에게 맡기고, 무술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사라이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하게 외쳤다. 염라대왕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다. 훌륭한 무사로 만들어 놓아라.”

!”

사라이온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문을 나서는데 염라대왕이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에게 잘 대해줘야 한다!”

사라이온도 닫히는 문 뒤로 크게 외쳤다.

, 알겠습니다.”

-6-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시후는 검술에 매우 뛰어난 14살의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악마와 다크엘프, 사라이온, 심지어 염라대왕과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지냈다. 2년 전과 똑같은 것이라고는 외모뿐이었다.

악마들은 무자비하고 영악했다. 그러나 무뚝뚝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대인관계가 잘 이루어지고, 문화를 즐길 줄 알며, 농담을 자주하는, 밝지만 좀 약삭빠른 종족이었다. 소심하기 보다는 자만하고, 베푸는 것도 좋아하고, 받는 것도 좋아했다. 시후도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바뀌어 있었다. 소심하고 부끄럼을 타던 아이는 사라졌다. 책을 너무나도 좋아했던 그 아이는 사라졌다. 대신 훨씬 활기차고, 자주 웃고, 무술과 말을 사랑하는 아이로 컸다. 그렇지만 소년과 인간으로써 악마들과 달리 자비를 베풀 줄 알았고 약삭빠른 것과도 거리를 두고 자랐다.

시후는 지난 2년간 밥 먹고 자고, 무술을 연마하고, 학문을 닦는 것 이외에는 한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의 절반 정도를 무술을 연마하는데 썼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2년이 지난 지금, 시후의 검술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제 그는 무술이나 학문을 배우지 않고, 하루 종일 그의 친구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 가끔가다가 장난삼아 칼을 가지고 싸우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시후는 멋지게 싸웠고,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며, 그를 칭송하고 추켜올렸다.

염라대왕은 시후가 전쟁에 나서도 상관없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들의

계획 3’ 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계획1’은 시후를 찾아서 데려오는 것 이였으며, ‘계획 2’는 시후를 훌륭한 전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계획 3’을 진행할 차례였다. ‘계획 3’은 바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사라이온에게 군대를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의 대단한 계획성과 순발력으로, 명령이 내려진지 바로 다음날, 엄청난 수의 군대가 소집되었다.

천국이나 지옥의 수호자들은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다. 그러니까 싸움의 목적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부상자들은 만들어내서 싸우지 못하게 만들고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고, 그러기에 그들의 전쟁은 훨씬 격렬하고 화끈하다. 멀리서 겁만 내고 총이나 몇 발 쏘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마구잡이로 싸우고 보는 전쟁이었다. 머리를 쓴다면 새로운 폭탄이나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기에 전쟁 때에는 인정사정없고, 잔인하기로는 훈족과도 다름없었다.

 

-7-

지유는 의자에 앉아서 하라이온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지유도 2년 동안 많이 변했다. 조금 더 성숙해지고 키가 부쩍 자랐으며, 더욱 쾌활해지고, 긍정적으로 자랐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으나, 웃을 때 행복해 보였고, 내면은 항상 사랑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진정한 내면을 볼 줄 아는 천사나 엘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예뻐 보였다. 갑자기 지유와 하라이온,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때 한 엘프가 문을 열고 급히 들어와 말했다.

하라이온님, 방금 전에 지옥에서 사자가 왔다 갔습니다. 전쟁을 선포하겠답니다.”

하라이온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유도 놀라지 않았다. 사라이온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겠다.”

그 엘프는 뒤를 돌다가 멈춰서 다시 지유를 바라보고 말했다.

지유야, 그 사자가 시후가 너를 알아보지 못해도 놀라지 말라더구나.”

그러고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지유는 깜짝 놀라서 하라이온에게 물었다.

하라이온, 그게 무슨 뜻이예요?”

하라이온이 대답이 없자, 지유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니깐요,”

“......”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 까만 장미

사라이온이 침묵을 지키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게 뭐요?”

니가 알려달라고 했잖아. 난 이만 간다.”

하라이온도 황급히 방을 빠져 나갔다. 지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했다. 얼마 전에 까만 장미에 대한 이야기를 루이스한테 들은 것 같았다. 어쩌면 사전에서 보았거나. 갑자기 지유의 머릿속에 까만 장미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다.

까만 장미: 매우 희귀한 꽃으로 색이 까맣다. 매우 아름다우나 가시가 매우 치명적이다. 가시에 찔리면 기억력의 모두 잃게 된다....

지유는 덜컥 겁이 났다. 머리가 하얗게 된 것 같았다.

또 덤벙대다가 가시에 찔린 거야? 아니면 궁금해서 그런 거야? 어떡하지? 진짜 나를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

여기까지 생각하자 코가 매워졌다. 지유는 식탁보가 축축해질 때까지 얼굴을 박고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울음을 뚝! 그치고는 조용히 일어나서 루이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방문 앞에 다다르자 지유는 무거운 마음으로 노크했다. 곧이어 금발의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천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코가 오뚝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루이스는 지금까지 지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친구가 되어준 장본인이다.

무슨 일이야? 너 울었니?”

루이스의 다정한 말투에 또 울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지유는 신발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혹시... 까만 장미의 가시에 찔렸을 때 해독제가 있어?”

. 근데 왜? 설마 찔렸니?”

아니, 진짜 있어?”

있기야 있지. ? 너 찔렸니?”

아니.”

그럼?”

지후가...찔렸대...”

지유가 최대한 무덤덤하게 말했다. 루이스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정적이 흘렀다. 정적이란 건 항산 깨지게 마련인데 이번 정적은 영원히 갈 것처럼 이어졌다.

 

-8-

그로부터 6일 뒤, 에라곤 초원을 사이에 두고, 양쪽 편의 진영이 생겼다. 이 초원은 천사 에라곤이 큰 공을 세운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에라곤 초원이라고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날 밤 각자의 진영 안에서 웃고, 마시고, 떠들었다. 어디에서도 긴장된 분위기를 찾아 볼 수 가 없었다. 긴장되고, 불안한 사람이 있다면 양쪽 편의 총 지휘관들과 지유뿐이었다. 서로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후와는 달리 지유는 이렇게 큰 전쟁에서 서로 다른 편에 서 있다는 것이 계속 신경 쓰였다. 물론 이번 전쟁에서 죽어도 천국에서 천사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지유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속히 원래 있던 지구로 돌아가서 흔히 말하는 인간으로서의, 지구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다. 이번 전쟁에서 죽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시후는 열심히 싸우다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은 다음에는 지옥에서나 천국에서의 또 다른 재미난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후는 지난 2년간 배운 모든 것들을 이 전투에 쏟아 부으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이 전투에서 지옥의 군대를 승리로 이끌어준다는 예언을 받은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의 칼집에는 오늘 아침, 사라이온이 건네준 예언속의 아이를 위한 칼, ‘프라포시 소드가 꽂혀 있었다. 이 칼은 어떠한 갑옷이라도, 혹은 어떠한 방패라도 깨트릴 수 있고, 뚫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보며 승리를 확신했고, 사라이온은 야망에 찬 미소를 지었다.

쌍둥이 중 하나는 불안하게, 또 다른 하나는 자신만만해 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태양이 뜰 무렵, 양 군대는 대열을 다 세우고, 전투 준비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양 군대가 준비를 모두 마치자, 무서운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두 지휘자는 서로를 오랫동안 주시했다. 천국의 군대의 지휘관은 하라이온이었고, 지옥의 군대의 지휘관은 사라이온 이었다. 구들은 잠시 후, 서로의 군대를 이끌고 한발, 한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천국의 군대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이 앞으로 뛰어나와서 칼은 겨누었다. 시후는 그것이 자신에게 내미는 도전장과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또다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시후가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클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능숙하게 받아 치고는 곧바로 시후의 목을 겨냥했으나, 시후가 재빨리 고개를 숙임으로서, 실패하고 말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유의 심장은, 클마의 심장보다도, 시후의 심장보다도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천국의 군대가 이겨야 평화가 찾아오겠지만, 시후가 죽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지유는 처음으로 시후가 예언 속의 아이가 맞기를 간절히 빌었다. 지옥의 수호자들이 권력을 가로채든, 말든 그저 시후만 죽지 않으면 된다. 지유의 마음이 어찌나 간절하고 애절한지, 염라대왕과 옥황상제조차도 시후에게 불멸이라는 선물을 하사해 주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런 지유의 기도가 있어서인지 시후는 여전히 상처 하나 없이 싸우고 있었다. 물론 클마도 그러했다. 운명의 여신은 아직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시후에게 먼저 주어졌다. 시후는 잠깐의 틈을 이용해서 클라의 옆구리를 칼로 힘껏 내리쳤다. 그런데 클마의 허리가 두 동각 나기는커녕, 시후의 칼이 갑옷에 부딪혀, 반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시후 자신도 놀랐지만 클마는 더욱 놀랐고, 다른 이들은 더욱 더 놀랐다. 특히 지옥의 군사들은 더욱 그랬다. 그 다음으로 클

마에게 기회가 왔다. 클마는 손등으로 시후의 옆 목을 순식간에 내리쳤다. 그 순간 모든 이들이 들숨을 쉬었으며, 시후는 기절하여 클마의 품으로 쓰러졌다. 지유는 시후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천막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려가면서 울음을 터트렸는데 첫 눈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진주보다도 더 아름다운 진주가 되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참되고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지유는 달려가서 클마가 안고 있는 시후를 꼭 껴안았다, 심장이 뛰고 있음을 한쪽 뺨으로 느끼면서 다른 쪽 뺨에는 안도의 미소가 스쳐갔다. 그 모습에 대초원의 모든 것들이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그들을 진실 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 정적을 깨고 하라이온이 큰 소리로 외쳤다.

보아라! 예언 속의 아이는 이제 없다. 칼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 그러니 이제 그만 조용히 돌아가라!”

그의 말이 끝나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때 시후가 깨어났다. 그리고는 주위의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하라이온이 말했다.

무기를 찾지 마라. 너희 군대는 이미 패한 거나 다름없다.”

시후는 자신이 기절했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그리고는 사라이온을 향해 돌아 서려는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가 시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아니.”

그의 대답에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시후는 무척 당황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지유의 마음은 잘 아는 하라이온이 다가와 지유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못 알아본다. 그것도 하나뿐이 가족이 말이다. 얼마나 서운할까? 그 모습을 보던 레골리스가 사라이온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병 하나를 받아내서 들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시후는 아는 얼굴이여서 그런지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골리스!”

레골리스는 시후에게 다가서더니 병을 건네며 말했다.

마셔.”

시후가 물었다.

? 이게 뭔데?”

그냥 마셔. 좋은 거야.”

시후가 사라이온을 돌아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엇인지 아는 염라대왕도 잠자코 있었다.

그게 뭔데요?”

지유가 물었다. 레골리스는 안심 하라는 듯이 말했다.

절대 해가 될 게 아니야.”

시후는 순식간에 병을 비우고는 빈 병을 레골리스에게 건냈다. 다른 병사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최면이라도 걸린 듯,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전쟁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다른 진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레골리스는 시후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자신의 군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피 한 방울도 나지 않았지만 가장 멋진 전투였다고 해도, 가장 멋진 병사들이였다고 해도 과찬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는 천국과 지옥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가장 칭송받게 된 이는 다름 아닌 레골리스였다.

-9-

5시간 뒤, 시후는 천국의 따듯한 방의 이불 속에 누워 있었고 지유는 시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지유는 제발 시후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바랬고, 그럴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모두가 레골리스가 준 약을 해독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유 자신도 그랬다. 그러나 아무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지유가 시후의 얼굴을 빤히 보며 기억이 되돌아오기를 기도하는데 시후가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지유가 떨리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최대한 밝게 하며 물었다.

안녕! ... 누군지 알아?”

시후는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너는 내가 누군지 알아?”

당연하지! 내 사랑하는 쌍둥이 오빠잖아!”

코가 매워진 지유가 말했다.

그럼 내가 누군지 알아?”

지유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용하고도 다정한 특유의 목소리로 시후가 말했다.

당연하지.”

그러고는 지유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한마디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지유야.”

 

 

에필로그

염라대왕과 옥황상제는 마치 옛 친구처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염라대왕은 전부터 궁금해 하고 있던 걸 물었다.

근데 참 이상하지, 왜 그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냐 말이야?”

왠지 알고 싶어?”

당연하지.”

왜냐하면 예언 속의 아이는 그저 수줍고, 책을 좋아하는 남자아이였지. 옛 기억을 잃어버린 훌륭한 검사가 아니었으니까.”

 

 

THE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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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바깥쪽의 나이자 너에게

 

혹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일출풍경을 본 적이 있니?
산 사이로 환한 빛을 내며 뜨는 태양을 본 기억이 있니?
아니면 어두운 밤길을 환히 비추는 하얗고 동그란 달을 유심히 들여다 본 적이 있니?
완벽한 구형의 보름달을 말이야. 그 달이 어떤 모양이든, 그 태양이 어디에 있든 태양과 달은 모두 하나지. 우리는 같은 태양과 같은 달을 보고 있는 거야 당연한 거지.
남한에 사는 나와 , 북한에 사는 너는 모두 같은 태양을 보고, 같은 달빛을 받으며 살고 있어. 보고 있는 곳도, 받고 있는 곳도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것을, 하나를 보고 있는 거야.
통일에 대한 우리의 마음도 하나일까?

안녕! 나는 남한에 사는 우지윤이야. 이제 중학교 2학년이고 노래 부르기와 글쓰기, 운동하기를 좋아해. 북쪽에 사는 너희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남쪽의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수학을 매우 싫어해. 그러나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마치 우리가 통일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 처음 드는 생각이 하나 있어. 우리는 왜 통일을 해야 할까? 적어도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일이 되기를 바라지만, 현재 각자의 삶에 만족하고 있어. 그런데 왜 통일을 해야 할까? 어떤 변화를 기대하고 꿈꾸며 통일을 하자고 하는 걸까? 정말 모르겠어.
그 이유를 어른들께 여쭤보고 싶지는 않아. 내 답을 스스로 찾아보고 싶거든.
더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통일을 해야 할까? 통일로 인해 우리나라가 더 강해진다는 근거가 없는 걸? 그렇다면 국토를 넓히기 위해? 조금 어이없는 반박일지 몰라도 나는 우리나라가 좁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다가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아무래도 이유를 알아내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 그래도 해야 한다고 느끼고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어쩌면 통일은 그런 걸 거야.
이유는 없지만 의미는 있는 것들이 있듯이, 이유는 없지만 해야 하는 것들이 있겠지?
어쩌면 통일은 그런 걸 거야.

 

어쨌든 통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꼭 통일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왜 우리는 꼭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까?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것이 부끄러워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이 두려워서?
분단국가라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이런 나라도 있으면 반대로 저런 나라도 있어야하는 법이니까 . 전쟁이 두렵다? 그러면 화해하고 남한 북한 따로따로, 그러나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
나도 물론 알고 있지. 말은 쉽다는 걸. 그리고 실제로는 이렇게 단순하지도 않다는 걸.
그러나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걸, 왜 하는지 몰라도 따로따로 행복하게 살 수 있어도 통일이란 해야 하는 우리의 숙제나 다름없겠지?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찌 보면 귀찮고 필요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도움이 되는 학교숙제처럼 말이야.

 

우리 반은 모두 12명이야. 여자가 5명이고 남자가 7명이지. 우리 반이 여행을 가서 길을 걷고 있는데, 내가 굉장한 소식 하나를 친구 채영이에게 말했다고 치자. 채영이는 친구 현서에게, 현서는 임지윤에게, 임지윤이는 지인이에게 그 소식을 전할거야. 지인이는 그 소식이 너무 멋지고 신기해서 관우에게 전하고, 관우는 관심을 가지고 들은 다음에 다른 남자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겠지? 뒤쳐져서 오던 지승이가 관심을 보이며 궁금해 하면, 범수나 준혁이가 알려주겠지. 그러면 지승이는 같이 오던 친구 정우에게도 전할거야. 결국 내가 말을 꺼낸 지 5분도 채 안되어서 12명 전체가 그 이야기를 알게 되는 거지.

그런데 여기서 내가 두 번을 사용한 낱말이 있어. 달랑 두 글자지만 아주 큰 힘을 가지고 있어서 통일에 아주 큰 기여를 할 낱말이야. 그 낱말은 바로 관심이야.

관우나 지승이 중 한명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반 전체가 다 그 이야기를 알기는 힘들었을 거야. 그것처럼 우리 한명 한명이 먼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통일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운 주제가 되고, 그럼으로 빨리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내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 챘을 거야. 3.8선 건너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너이자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썼거든.

. . ?

어른들은 이 지구, 그러니까 이 세계가 하나라는 말을 써. 이 세계가 하나라면 남한과 북한도 하나겠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고, 너와 나도 하나야. 같은 세계에 속해있는 데다가 같은 피까지 흐르고 있지.
하나라는 건 같다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하나니까,
곧 이렇게도 쓸 수 있는 거지.

 

201522

3.8선 안쪽의 너이자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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